2025. 1. 26. 20:46ㆍ카테고리 없음
와인을 오래 즐겨본 사람은 아니지만 내가 마셔본 몇 안 되는 와인 중에 내가 아주 좋아하는 와인이 있다. 미국 와인. 그 중에서도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지역의 와인이다.
나는 프랑스 와인으로 처음 와인 세계에 입문했다. 그래서인지 초반에는 와인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종류도 너무 많고, 개성도 다양했다. 당연한 결과지만 와린이인 내가 마시기엔 역시 어려웠다.
그런 나에게 처음 이 와인 뭐지? 싶었던 것이 있다. 미국 와인 '진판델(Zinfandel)' 품종을 테이스팅 해 보았을 때다. 와인을 하나도 모르는 내가 '이건 좀 맛이 쉽다'라고 말했다. 약간의 단맛과 약간의 진득함이 느껴지고 타닌이 적고 풍미가 강했다. 색이 진한 루비 색인 것도 좋았다. 추후 진판델에 대해 공부할 때 이 품종은 비교적 쉬운 맛이 난다고 하는 말에 놀라기도 했다. 내가 직관적으로 느낀 것이 통상적으로 맞다고 할 때면 묘한 쾌감이 든다. 이런 것들 때문에 계속해서 와인을 공부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기나 보다.
실제로 진판델은 와인 입문자, '와린이'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품종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프랑스 와인이 어렵다고 느꼈던 것처럼, 와인 입문자에게는 신대륙에서 구대륙 순으로. 칠레 > 미국 > 이탈리아 > 프랑스 순으로 마셔볼 것을 추천하고 있다.

이쯤에서 내가 입문자를 위한 진판델을 하나 추천해 보자면 왠지 으스스 한 이름을 가진 '고스트 파인'을 권해본다.(한국에서는 가성비 와인으로 정말 유명하고 인기가 많다.) 레드 와인이며 알코올 도수는 14.5%이다. 가격은 약 29,900원 정도. 바디감과 타닌이 모두 중간 정도이며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좋다.

다시 나파밸리 이야기로 넘어가면.. 미국 나파밸리는 세계 최고의 와인 산지 중 하나다. 내가 와인에 대해 전혀 몰랐을 때에는 미국에서도 와인이 생산이 되는지 몰랐다. 그리고 마실 때조차도 미국 와인에 대해 어떠한 기대도 없었다. 바보 같지만 '중국산'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사죄합니다.) 나파밸리 와인은 역사 깊은 유럽 와인에 맞서는 신대륙 와인의 자존심이다. 우선 최적의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다. 여름이 길고 건조한 기후는 포도 생산에 적합한 천혜의 환경이다. (포도는 습한 환경에서 쉽게 썩고 당도도 떨어진다.) 게다가 연중 온도 또한 일정하다. 겨울에 서리를 맞는다든지 하는 포도 생산에 치명적인 조건들이 없다고 봐도 된다.
나파밸리는 기록상 1683년 캘리포니아 최초 포도나무가 심어졌다고 한다. 다만 해당 지역은 개발되지 않고 버려졌기 때문에 사실상 1779년 선교사 그룹이 설립한 포도원이 최초며, 1830년 최초의 상업적 와이너리가 탄생되었다. 이 시기에는 와인 생산에 대한 규제라든지 양조법 등이 정립되어 있지 않아 자유롭게 포도를 심고 재배하여 와인을 생산할 수 있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같은 대표적인 와인 산지는 엄격하고 체계적인 기준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에 반해 미국은 그러한 것들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서 자유로이 생산된 와인이 소비 또한 굉장히 잘 되었다.
기후조건도 좋고, 법적 규제도 없고, 소비도 많이 되니 많은 자본을 축적한 자본가들이 뛰어들었다고 한다. 다만 와인을 만드는 데는 돈뿐만 아닌 '기술'이 굉장히 중요한데, 미국의 경우 어떻게 유럽을 따라잡을 만큼의 기술 전략을 펼친 것일까? 유럽에 비해 경험치가 적은 미국은 양조가 등의 조직적인 협업과 정보 공유를 활발히 했다고 한다. 유럽에 비해 짧은 와인 역사를 가졌지만 데이터, 과학기반, 연구 등의 기반으로 빠르게 노력하여 한계를 극복한 것이다. 그렇기에 굉장히 빠른 속도로 품질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품질이 상향 평준화가 되며 그 이상의 차별화가 필요해졌다. 그렇기에 미국은 품질이 정말 좋은 고품질 와인으로 승부를 보려 했다. 누구나 생산할 수 없는 한정 소량 생산을 이용한 것이다. 나파밸리 최적화 포도 품종의 카베르네 쇼비뇽으로 스타 양조가들을 고용한다던가, 특별한 와인 밭 등 시설부터 포도밭, 생산 환경, 마케팅, 브랜드 스토리까지 특별한 것을 다 넣어 극히 이례적인 와인을 탄생시켰다.


미국이 이렇게까지 한건 보르도의 1등급 와인과 경쟁을 하겠다는 도전짱을 내민 것이기도 하다. 그러다 1976년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파리의 심판'은 영국의 와인 평론가 스티븐 스퍼리어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한 와인 블라인드 테스트로, 평론가 총 11명 중 9명이 프랑스인으로, 시음 결과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화이트와 레드와인 모두 프랑스의 유명한 샤또들을 제치고 미국 와인이 1위를 차지했다. 프랑스 와인 업계의 자존심을 박살 내버린 대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신대륙 와인이 차츰 주목받기 시작한다.
자본은 기후도 조절할 수 있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최적의 포도 수확을 위해 엄청난 자본을 들여 일조량과 강우량 등을 조절할 수 있는 최첨단 시설을 만들면 된다. 그런데 이 나파벨리의 경우, 이미 기후나 자연조건을 완벽히 갖추고 있기 때문에 좀 더 기술적인 분야에 투자를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상태 좋은 포도알을 선별하는 것은 최상급 와인 생산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보통 이 작업은 노동력을 투입하여 사람이 선별한다. 하지만 클라스가 다른 미국은 광학식 선별기를 도입하여 최상의 포도를 효율적으로 엄선하는 기술을 펼쳤다. 이처럼 미국의 나파밸리 와인의 명성은 최상의 기후도 가졌지만 오랜 시간의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다보니 나도 신대륙의 와인들에게 조금 더 애정이 가는 것 같기도 하다. 호주와 남아공의 와인은 마셔본 적이 없지만, 칠레 와인은 취향에 잘 맞았던 기억이 있다. 구대륙을 향한 신대륙의 와인의 반란. 선발주자를 따라잡기 위한 후발주자의 움직임. 이런 것들이 참 재미있다. 사실 프랑스가 조금 싫은 감정도 투영된 듯. 기회가 된다면 파리의 심판에서 1등한 미국의 스택스립 와인셀라 'Stag's Leap Wine Cellars' 를 마셔보고 싶다.